Sisters of Notre D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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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과 인연
작성자
최성옥
작성일
조회
1,219
‘하느님 말씀 주일’
연중 제3주일은 ‘하느님의 말씀 주일’ 이다. 2019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 예로니모 사제학자 기념일인 9월 30일 자의교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Aperuit illis)를 발표해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선포하였다. 예로니모는 2019년 선종 1602주년을 맞는 분으로, 성경을 (대중)라틴말로 옮긴 뛰어난 성서학자였다. 그는 “성경에 대한 무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라는 말을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교황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구원은 성경과 그리스도를 알고 사는 것에 온전히 달려 있다”고 하였다. 또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Aperuit illis) 교서에서 “전례력에 하느님의 말씀을 위한 특정 주일을 제정하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그분의 소중한 말씀을 새롭게 이해하고, 세상에 가늠할 수 없는 하느님 말씀의 풍부한 가치를 선포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 의미를 밝혔다. 교황의 ‘하느님의 말씀 주일’ 선포 의지는 지난 2016년 자비의 특별 희년을 마무리하며 발표한 교서 「자비와 비참」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당시 교황은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해마다 주일 가운데 하루를 정해서 성경을 더욱 잘 알리고 더 널리 전파하는 노력을 쇄신할 수 있다면 좋을 것”(「자비와 비참」 7항)이라고 말한 바 있다. 특히 교황은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 1년 내내 이어지는 행사가 되길 기대했다. 그리스도인은 부활한 그리스도와 성경에 대한 지식과 사랑 속에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가톨릭 신문 편집) 연중 3주일에 배치한 것도 의미가 크다. 일반적으로 새 해 첫날은 천주의 모친 대축일이고, 이어서 주님 공현축일과 세례 축일이 이어진다. 연중 2주간에 해당하는 1월18-1월25일 바오로 개종 축일까지는 그리스도교 일치주간이다. 나의 생각에 말씀의 위대한 힘에 대한 신앙과 영성 깊은 통찰력이 있으신 교종 프란치스코는 당신의 임기 전 이미 시행되고 있던 일치주간이 없었더라면 한 주일 앞당겨 연중 2주일을 말씀주일로 선포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교종은 새 해의 시작부터 말씀주일을 정하여 신자들을 말씀으로 신앙의 기본과 본질을 양육하고 완성하도록 의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공부는 내 하느님과 내 신앙에 대한 예의’
올 해로 2019년에 선포된 세 번째 말씀주일을 맞으면서, 내 신앙과 수도 여정을 걸어오며 말씀과의 섭리와 안배를 회고하고 정리해본다. 나는 겨우 한 달 교리공부를 한 뒤 영세를 했다. 그러니 교리도 그리고 원 교리인 성경도 왕 무식은 물론이고 관심조차 없었다. 수도원에 입회한 초기 양성시절에 여러 교육들이 있었다. 그러나 특별히 성경말씀에 대한 중요성과 강조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주는 분들은 없었다. 통신성서 과정이 있긴 했지만 바쁜 양성과정에 숙제하듯 텍스트를 찾아 질문의 답을 찾아 맞추는 그 공부는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서원 초년생 시절 모태 신앙 ‘ㅂㄹㄸㅅ 선배’가 허리가 아프다고 누운 채 성경을 배에 올려놓고 읽는 모습을 보면서 혼자 생각했다. “저게 뭔 재미가 있남?!” 그 무렵 같이 서울 신학교에 다니던 ‘ㄹㅈ 선배’ 가 말했다. “수녀님 기회 되면 말이지 성경의 모든 텍스트들을 강의록으로 만들어 봐” ‘어!... 그거 괜찮겠는데.’ 그러나 또 귓등으로 듣고 흘려보냈다. 입회 동기 ‘ㅍㅅㅋ수녀도 거들었다. “내가 지적 허영이 쫌 있어서 이 책 저 책 보았지만, 세상에 성경만한 것은 없는 것 같아” 꽤 그럴싸해 들렸지만 ‘아직은 아니네...!’였다. 입회를 앞 두고 담당 수녀님이 “어떤 수녀님이 되고 싶냐?” 고 물으셨다. “본당 수녀님이 되고 싶다”고 하였다. 한 달간 교리 받으면서 본당 수녀님을 본 것이 내가 본 수녀님 모습의 전부였으니 형편으로 치면 그리 잘못된 대답도 아니었다.
드디어 희망했던 본당 수녀가 되었다. 그것도 분원장 완장을 차고, 서울시하고도 강남의 한복판에 있는 성당에 배정을 받았다. 함께 사는 영민한 후배 수녀는 공부에 관심과 열정이 많아 이미 높으신 분의 허락을 득하고 관심 분야에 뛰어들었다. 알 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세 명 구성원에, 나는 책임까지 맡아 부임했는데 너다들이 모두 덩달아 공부를 하겠다면 좋아할 본당 신부가 있겠는가? 나라도 정색을 하고 일침을 놓을 일이라 애저녁에 인심 좋은 선배로 위장하고, 주어진 소임에나 열심히 하면서 남는 시간은 세월 흘러가는 대로 살기로 했다. 신자들과 만나서 부담 없는 세월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조건도 딱 좋았다. 오 분 거리 안에 영화관이, 삼십 분만 나가면 늘씬하고 아름다운 한강변이, 한 시간만 투자하면 오갈 데가 많고도 편한 그 곳이었다. 첫 달 봉성체를 나갔다. 마리아 할머니는 이층 고급 빌라에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사시고 계셨는데, 구십이 넘으신 고령으로 창 살 없는 이층 방 감옥살이중이셨다. 봉성체의 그 바쁜 스케쥴 그리고 첫 만남인데 할머니는 성체보다 성경에 대해 열변을 토하셨다. 성경은 총 몇 페이지이고 구약과 신약은 각 몇 페이고 내용은 어떻고 저떻고...“내가 이번에 일곱 번째 성경을 통독했는데 열한 번만 읽고 하느님 만나러 가고 싶다.”는 말씀으로 대강 마무리를 하셨다. ‘에고 본당의 이 젊은 수녀는 한 번도 안 읽었는데...’ 할머니가 성경에 마음을 붙이기 전에는, 하루 종일 레퍼토리가 “아퍼. 병원가자” 였다고 한다. 병원 타령이나 해야 며느님이 모시고 외부로 나가니 말이다. 당연히 고부간의 사이도 별로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병원 이야기가 쏘옥 들어가고 조용해지시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올라가보니 책장 귀퉁이에 고물처럼 세워 둔 성경을 꺼내 읽으시며 삼매경에 빠져, 아프다고 병원가자고 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었다. 성경의 한 텍스트마다 통독을 마치시면 며느님과 함께 하는 레지오 단원들이 달려가서 책 걸이를 해주니, 고부간 사이도 엄청 좋아졌다고 며느님이 주석을 달았다. ‘좋구나 훌륭한 분들이구나. 나는 한 번도 전체를 읽지 못했는데...’ 그러나 그뿐으로 끝 이었다. 성당에서 사십 주간 성경공부 프로그램이 있어 신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강사 수녀님은 열강이 스피커를 타고 들렸지만, 나는 봉사자들이 초대하는 식사모임에나 참석하여 맛난 밥만 축내고 왔을 뿐이었다. 그렇게 삼 년 세월이 아깝게도 쏜 살같이 다 흘러가 버렸다. 그 다음 나의 임지는 멀고 먼 광주교구 평생교육원 ‘피정∙연수’ 소임이었다. 거리도 멀었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무연고지, 마치 절해고도로 유배 떠나는 처지였다. 사도직 소임도 이래저래 시간 여유가 있었다. 불현 듯 ‘뭐 하고 삼 년 보내고 살지?’ 라는 생각을 하는데, 이백여년전 강진에 유배 오신 정약용 선생이 생각났다. ’그 어른 유배 왔었지 그 어른처럼 공부나 해볼까?“ 당시 교육원은 교구청 일부 부서들과 함께 같은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마침 성경통독 피정을 실시한다는 플랭 카드가 눈에 띄였다. ”저거나 가 볼까?“ 사도직 업무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나의 요청에, 신앙과 인품 교육적 마인드가 뛰어나신 원장 신부님은 두 말 않고 두 차례 적지 않은 금액의 피정비를 투자해주셨다.
2005년 겨울 성경통독 피정은 그 해 성탄과 송년의 날과 새 해 첫 날을 모두 말씀 피정과 함께하는 일정이었다. 이렇게 구성된 피정 일정은 내가 천주교 신자로 지낸 해 중 최고의 전례적 신앙적 긍지와 보람을 뿌듯하게 갖게 하였다. 통독을 완주해보니 이제 혼자서도 성독을 할 수 있는 은혜와 힘이 생겼다. 소임 환경도 좋은 뒷받침을 하였다. 다른 직원보다 한 시간 출근해서 창세기부터 성독을 하면서 ‘와 닿는 것’ 중요한 것‘을 두 가지로 패턴으로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독학 성경 공부는 2010년 성서백주간 소임을 받으면서 더욱 더 성장할 수 있었다. 한국 교회에서 수도자의 소임이 대부분 영구적이 아닌 그저 1~3년 한시적이기에 촌음을 아껴 쓰며 말씀 안에서 기뻐 뛰놀았다. 삼년간 꼬박 정기휴가도 고요한 사무실에서 성독으로 대체하였다. ’통독-성독-정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현재 십 칠년째 성경을 성독하며, ‘ㄹㅈ 선배’ 가 툭하고 던진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 전 텍스트를 온전히 독학으로 강의록화 하였다. 3차례 이상 수정 작업을 반복했지만 들여다보면 허접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성령께서 그 때마다 내게 주신 나만의 것,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된 특별한 내 것들이 있다. 내가 읽고 반복하는 동안에 나의 성령께서 직접 전해주시는 내가 만난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성모님, 성인들인 인생사 신앙사의 가르침들이 있다.
나는 비교적 둔하고 느린 편이다. 반복해야 비로서 필feel이 꽂히고 이해가 되는 사람이다. 사도로 비교하면 바오로가 아니라 베드로다. 그런데 베드로는 강점이 있다. 바위, 여러 번 시도해서 들어오면 콱 박혀버리는 베드로. 말씀을 만난 것은 내 신앙과 인생 수도여정에 너무도 귀한 선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말씀에 나는 살짝 중독이 된 듯 느껴진다. 그러나 그 중독은 참으로 복되고 보람된 것이다. 나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가르침, 믿는이로서 신앙과 영성의 기본과 본질, 궁극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정의와 공평 평화와 사랑이 바로 서는 하느님 나라의 회복이다. 그 옛날이 보시니 참으로 좋았던 에덴 동산의 회복이다. 그리고 그 회복을 위해 예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짧지 않는 시간동안 성독하면서 지적으로 축적한 것이 꽤 된다. 그러나 지적인 축적은 실천에 비교하면 참 된 것이 아니다.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천이 비교불가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알되 실천하지 않는 공부는 참 된 것이 아니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욕보이고 능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 왈 두렵고 무서워서 말씀 알기를 중지했노라고 했다. ‘어라라~’ 딴에 꽤 그럴싸 약다 못해 지혜로운 처신 같지만, 그렇다고 피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지와 더욱 고의적 무지는 중죄이다. 무지는 칠죄중에도 해당된다. 또한 ”너의) 바로 그 말이 너를 단죄할 것이다.”(마태 12,37) 라고 이미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실천이라는 거룩한 족쇄가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라고 재촉한다. 진실로 참 되고 귀한 것을 만나고 알았다면 사는 것으로 증거해야 할 일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과 예수를 올바르게 찬미찬양하고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말씀과 그리 인연이 없어도 이미 높은 성덕과 신앙의 경지에 있는 분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성경을 공부하는 태도는 나 자신 그리고 사랑하는 교회와 공동체에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께 대한 예의이며 흠숭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알아야 바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두 가지, 정통 가르침과 정통 솔선수범에 집중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그분의 전부였다.
연중 제3주일은 ‘하느님의 말씀 주일’ 이다. 2019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 예로니모 사제학자 기념일인 9월 30일 자의교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Aperuit illis)를 발표해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선포하였다. 예로니모는 2019년 선종 1602주년을 맞는 분으로, 성경을 (대중)라틴말로 옮긴 뛰어난 성서학자였다. 그는 “성경에 대한 무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라는 말을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교황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구원은 성경과 그리스도를 알고 사는 것에 온전히 달려 있다”고 하였다. 또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Aperuit illis) 교서에서 “전례력에 하느님의 말씀을 위한 특정 주일을 제정하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그분의 소중한 말씀을 새롭게 이해하고, 세상에 가늠할 수 없는 하느님 말씀의 풍부한 가치를 선포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 의미를 밝혔다. 교황의 ‘하느님의 말씀 주일’ 선포 의지는 지난 2016년 자비의 특별 희년을 마무리하며 발표한 교서 「자비와 비참」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당시 교황은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해마다 주일 가운데 하루를 정해서 성경을 더욱 잘 알리고 더 널리 전파하는 노력을 쇄신할 수 있다면 좋을 것”(「자비와 비참」 7항)이라고 말한 바 있다. 특히 교황은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 1년 내내 이어지는 행사가 되길 기대했다. 그리스도인은 부활한 그리스도와 성경에 대한 지식과 사랑 속에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가톨릭 신문 편집) 연중 3주일에 배치한 것도 의미가 크다. 일반적으로 새 해 첫날은 천주의 모친 대축일이고, 이어서 주님 공현축일과 세례 축일이 이어진다. 연중 2주간에 해당하는 1월18-1월25일 바오로 개종 축일까지는 그리스도교 일치주간이다. 나의 생각에 말씀의 위대한 힘에 대한 신앙과 영성 깊은 통찰력이 있으신 교종 프란치스코는 당신의 임기 전 이미 시행되고 있던 일치주간이 없었더라면 한 주일 앞당겨 연중 2주일을 말씀주일로 선포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교종은 새 해의 시작부터 말씀주일을 정하여 신자들을 말씀으로 신앙의 기본과 본질을 양육하고 완성하도록 의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공부는 내 하느님과 내 신앙에 대한 예의’
올 해로 2019년에 선포된 세 번째 말씀주일을 맞으면서, 내 신앙과 수도 여정을 걸어오며 말씀과의 섭리와 안배를 회고하고 정리해본다. 나는 겨우 한 달 교리공부를 한 뒤 영세를 했다. 그러니 교리도 그리고 원 교리인 성경도 왕 무식은 물론이고 관심조차 없었다. 수도원에 입회한 초기 양성시절에 여러 교육들이 있었다. 그러나 특별히 성경말씀에 대한 중요성과 강조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주는 분들은 없었다. 통신성서 과정이 있긴 했지만 바쁜 양성과정에 숙제하듯 텍스트를 찾아 질문의 답을 찾아 맞추는 그 공부는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서원 초년생 시절 모태 신앙 ‘ㅂㄹㄸㅅ 선배’가 허리가 아프다고 누운 채 성경을 배에 올려놓고 읽는 모습을 보면서 혼자 생각했다. “저게 뭔 재미가 있남?!” 그 무렵 같이 서울 신학교에 다니던 ‘ㄹㅈ 선배’ 가 말했다. “수녀님 기회 되면 말이지 성경의 모든 텍스트들을 강의록으로 만들어 봐” ‘어!... 그거 괜찮겠는데.’ 그러나 또 귓등으로 듣고 흘려보냈다. 입회 동기 ‘ㅍㅅㅋ수녀도 거들었다. “내가 지적 허영이 쫌 있어서 이 책 저 책 보았지만, 세상에 성경만한 것은 없는 것 같아” 꽤 그럴싸해 들렸지만 ‘아직은 아니네...!’였다. 입회를 앞 두고 담당 수녀님이 “어떤 수녀님이 되고 싶냐?” 고 물으셨다. “본당 수녀님이 되고 싶다”고 하였다. 한 달간 교리 받으면서 본당 수녀님을 본 것이 내가 본 수녀님 모습의 전부였으니 형편으로 치면 그리 잘못된 대답도 아니었다.
드디어 희망했던 본당 수녀가 되었다. 그것도 분원장 완장을 차고, 서울시하고도 강남의 한복판에 있는 성당에 배정을 받았다. 함께 사는 영민한 후배 수녀는 공부에 관심과 열정이 많아 이미 높으신 분의 허락을 득하고 관심 분야에 뛰어들었다. 알 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세 명 구성원에, 나는 책임까지 맡아 부임했는데 너다들이 모두 덩달아 공부를 하겠다면 좋아할 본당 신부가 있겠는가? 나라도 정색을 하고 일침을 놓을 일이라 애저녁에 인심 좋은 선배로 위장하고, 주어진 소임에나 열심히 하면서 남는 시간은 세월 흘러가는 대로 살기로 했다. 신자들과 만나서 부담 없는 세월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조건도 딱 좋았다. 오 분 거리 안에 영화관이, 삼십 분만 나가면 늘씬하고 아름다운 한강변이, 한 시간만 투자하면 오갈 데가 많고도 편한 그 곳이었다. 첫 달 봉성체를 나갔다. 마리아 할머니는 이층 고급 빌라에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사시고 계셨는데, 구십이 넘으신 고령으로 창 살 없는 이층 방 감옥살이중이셨다. 봉성체의 그 바쁜 스케쥴 그리고 첫 만남인데 할머니는 성체보다 성경에 대해 열변을 토하셨다. 성경은 총 몇 페이지이고 구약과 신약은 각 몇 페이고 내용은 어떻고 저떻고...“내가 이번에 일곱 번째 성경을 통독했는데 열한 번만 읽고 하느님 만나러 가고 싶다.”는 말씀으로 대강 마무리를 하셨다. ‘에고 본당의 이 젊은 수녀는 한 번도 안 읽었는데...’ 할머니가 성경에 마음을 붙이기 전에는, 하루 종일 레퍼토리가 “아퍼. 병원가자” 였다고 한다. 병원 타령이나 해야 며느님이 모시고 외부로 나가니 말이다. 당연히 고부간의 사이도 별로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병원 이야기가 쏘옥 들어가고 조용해지시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올라가보니 책장 귀퉁이에 고물처럼 세워 둔 성경을 꺼내 읽으시며 삼매경에 빠져, 아프다고 병원가자고 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었다. 성경의 한 텍스트마다 통독을 마치시면 며느님과 함께 하는 레지오 단원들이 달려가서 책 걸이를 해주니, 고부간 사이도 엄청 좋아졌다고 며느님이 주석을 달았다. ‘좋구나 훌륭한 분들이구나. 나는 한 번도 전체를 읽지 못했는데...’ 그러나 그뿐으로 끝 이었다. 성당에서 사십 주간 성경공부 프로그램이 있어 신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강사 수녀님은 열강이 스피커를 타고 들렸지만, 나는 봉사자들이 초대하는 식사모임에나 참석하여 맛난 밥만 축내고 왔을 뿐이었다. 그렇게 삼 년 세월이 아깝게도 쏜 살같이 다 흘러가 버렸다. 그 다음 나의 임지는 멀고 먼 광주교구 평생교육원 ‘피정∙연수’ 소임이었다. 거리도 멀었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무연고지, 마치 절해고도로 유배 떠나는 처지였다. 사도직 소임도 이래저래 시간 여유가 있었다. 불현 듯 ‘뭐 하고 삼 년 보내고 살지?’ 라는 생각을 하는데, 이백여년전 강진에 유배 오신 정약용 선생이 생각났다. ’그 어른 유배 왔었지 그 어른처럼 공부나 해볼까?“ 당시 교육원은 교구청 일부 부서들과 함께 같은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마침 성경통독 피정을 실시한다는 플랭 카드가 눈에 띄였다. ”저거나 가 볼까?“ 사도직 업무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나의 요청에, 신앙과 인품 교육적 마인드가 뛰어나신 원장 신부님은 두 말 않고 두 차례 적지 않은 금액의 피정비를 투자해주셨다.
2005년 겨울 성경통독 피정은 그 해 성탄과 송년의 날과 새 해 첫 날을 모두 말씀 피정과 함께하는 일정이었다. 이렇게 구성된 피정 일정은 내가 천주교 신자로 지낸 해 중 최고의 전례적 신앙적 긍지와 보람을 뿌듯하게 갖게 하였다. 통독을 완주해보니 이제 혼자서도 성독을 할 수 있는 은혜와 힘이 생겼다. 소임 환경도 좋은 뒷받침을 하였다. 다른 직원보다 한 시간 출근해서 창세기부터 성독을 하면서 ‘와 닿는 것’ 중요한 것‘을 두 가지로 패턴으로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독학 성경 공부는 2010년 성서백주간 소임을 받으면서 더욱 더 성장할 수 있었다. 한국 교회에서 수도자의 소임이 대부분 영구적이 아닌 그저 1~3년 한시적이기에 촌음을 아껴 쓰며 말씀 안에서 기뻐 뛰놀았다. 삼년간 꼬박 정기휴가도 고요한 사무실에서 성독으로 대체하였다. ’통독-성독-정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현재 십 칠년째 성경을 성독하며, ‘ㄹㅈ 선배’ 가 툭하고 던진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 전 텍스트를 온전히 독학으로 강의록화 하였다. 3차례 이상 수정 작업을 반복했지만 들여다보면 허접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성령께서 그 때마다 내게 주신 나만의 것,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된 특별한 내 것들이 있다. 내가 읽고 반복하는 동안에 나의 성령께서 직접 전해주시는 내가 만난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성모님, 성인들인 인생사 신앙사의 가르침들이 있다.
나는 비교적 둔하고 느린 편이다. 반복해야 비로서 필feel이 꽂히고 이해가 되는 사람이다. 사도로 비교하면 바오로가 아니라 베드로다. 그런데 베드로는 강점이 있다. 바위, 여러 번 시도해서 들어오면 콱 박혀버리는 베드로. 말씀을 만난 것은 내 신앙과 인생 수도여정에 너무도 귀한 선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말씀에 나는 살짝 중독이 된 듯 느껴진다. 그러나 그 중독은 참으로 복되고 보람된 것이다. 나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가르침, 믿는이로서 신앙과 영성의 기본과 본질, 궁극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정의와 공평 평화와 사랑이 바로 서는 하느님 나라의 회복이다. 그 옛날이 보시니 참으로 좋았던 에덴 동산의 회복이다. 그리고 그 회복을 위해 예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짧지 않는 시간동안 성독하면서 지적으로 축적한 것이 꽤 된다. 그러나 지적인 축적은 실천에 비교하면 참 된 것이 아니다.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천이 비교불가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알되 실천하지 않는 공부는 참 된 것이 아니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욕보이고 능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 왈 두렵고 무서워서 말씀 알기를 중지했노라고 했다. ‘어라라~’ 딴에 꽤 그럴싸 약다 못해 지혜로운 처신 같지만, 그렇다고 피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지와 더욱 고의적 무지는 중죄이다. 무지는 칠죄중에도 해당된다. 또한 ”너의) 바로 그 말이 너를 단죄할 것이다.”(마태 12,37) 라고 이미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실천이라는 거룩한 족쇄가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라고 재촉한다. 진실로 참 되고 귀한 것을 만나고 알았다면 사는 것으로 증거해야 할 일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과 예수를 올바르게 찬미찬양하고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말씀과 그리 인연이 없어도 이미 높은 성덕과 신앙의 경지에 있는 분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성경을 공부하는 태도는 나 자신 그리고 사랑하는 교회와 공동체에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께 대한 예의이며 흠숭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알아야 바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두 가지, 정통 가르침과 정통 솔선수범에 집중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그분의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