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sters of Notre D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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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 자매님의 겸손
작성자
최성옥
작성일
조회
562
“ㅁ 자매님의 겸손”
‘ㅁ 자매님’은 후천적 시각 장애인이다. 망막색소변성증이란 몹쓸 병이 그녀를 덮쳤기 때문이다. 성서백주간 구약을 다 마치고 신약을 하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하느님께 말씀 공부를 다 마칠 때까지 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눈물로 애원했지만, 점점 멀어져가는 시력으로 남은 지면들은 눈물로 쪼글쪼글 쪼그라들었을 뿐, 열한 살 작은 아들의 모습을 생生 눈으로 담고 영영 볼 수 없는 장님이 되어 버렸다. 신자 연예인인 이동우님도 같은 처지인 것으로 안다. 이런 경우 그분들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들을 어떤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태어날 때부터도 아니고 멀쩡하게 잘 보고 살다가,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이 현실의 수많은 사연 사연들을. 헤아릴 수도 형용할 수도 없는 십자가의 고통은 동병상련 처지가 아니고는 결코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날 자매님의 남편이 “너 안 보이는 거? 그거 거짓말이지?” 라고 울부짖더라는 고백은, 듣는 나의 마음도 예리하게 도려내는 아픔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광풍처럼 다가온 고통과 십자가에 주저앉지 않았다. 초인적인 믿음과 의지로 하나씩 극복하고 승리의 현실들을 이루어냈다. 점자를 배웠고 일상을 다시 훈련하고, 눈은 뜨고 있으나 인격이 눈 먼 이들이 던지는 무수한 상처와 모멸들의 파편들을, 때론 참아 받고 때론 도전하면서 이겨내는 삶을 살고 있다. 수년 전 자매님이 해설하는 부활 장엄미사를 함께 봉헌했다. 주례사제와 신자들과 호흡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맞추며, 전례 해설을 하는 모습에 놀랐고, 해설 한마디 한마디에 진하게 묻어나는 신앙의 무게감에 압도되었었다. 자매님은 대부분 성가의 모든 절을 몽땅 외운다. 나는 1절도 겨우 따라 하는데...시력을 잃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더 귀한 카리스마들을 많이 받은 “ㅁ 자매님!”, 나는 그녀가 우리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예수를 닮은 겸손한 신자임을간증하려고 한다.
그녀는 관할 본당에서 주간 전례 해설 봉사를 하고 있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수년째 해 오는 봉사이다. 그런데 그녀의 당번 일에 장례미사가 났다. 본당의 전례분과장 “ㄹ님”(이하 ㄹ님)은 직책 때문인지, ‘의전’이가장 의식되었던 것 같다. 장례미사 해설 누가 할 것인가 물어 오기에, “내가 당번 일이니 내가 한다”고 했다. 그러자 ㄹ님은난색을 표하며, “자매님이 이런데(?)해설하는 것을, 유가족과 참석자들이 보면 그렇지아니한가?”라고 하더란다. 이에 ㅁ 자매님이“그렇지 않는 것이 도대체 뭐냐? 문제없다. 내가 한다.”라고 응수했더니, 꼭 해야 한다면 “신부님께 허락을 받아라”라고 했다. “걱정마라 이미 받았다”고 하며 더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ㄹ 님, 지금 장례미사 해설자 선정과 나를 염두에 두고 한 말과 행동이, 하느님이 보시기에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자매님이 하느님도 말씀도 전례도 잘 모르니 지금 나에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앞으로 나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지 마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 자신을 비롯한 눈 뜬 사람들의 소경적 믿음과 일상을 성찰하였다. 동시에 믿음과 용기로 눈 뜬 사람의 무지와 만용에 직면 직설한 ‘ㅁ 자매님의 겸손’을 한껏 칭찬하였다. “잘했다 아무 소리 안했으면 시행착오가 반복될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잘했다”고. 우리 교회와 사회에는 이런 겸손이 드물고 약하다. 그러면서 겸손, 참 된 겸손이란 무엇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一謙四益(일겸사익)”이란 말이 있다. 한 번의 겸손은 천,지,신,인의 네 가지로부터 유익함을 가져오게 한다는 뜻으로, 겸손하여야 함을 강조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겸손謙遜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존중하고 자신을 낮추는 태도가 있다”라고 한다. 한자어도 이를 증명 하듯 그 훈을 겸손할 겸, 겸손할 손으로 강조하여 드러내고 있다. 영어는 ‘humility’로 라틴어 ‘humilis’에서 온 것으로 인간을 뜻하는 ‘human’과 함께 그 어원은 땅(humus)또는 흙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왜 흙과 땅일까? 흙과 땅의 본질과 실체는 무엇인가? 놀랍게도 2,500년 전 자연)철학자들은 자연과 세계의 기원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성경과 신앙의 차원에서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너무나 중요한 필요하고 좋은 창조물이다. 겸손에 대해 몇 가지 해석을 살펴보았는데, 나름대로 일리는 있지만 꽉 찬 느낌이 없이 뭔가 허전하였다. 그래서 성경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고맙게도 성경은 인류사에 가장 겸손했던 두 분에 대해 바로 전해주고 있었다. 모세와 예수이시다. 민수기는 모세의 겸손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런데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다.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민수 12,3)” 본문의 앞∙뒤에 배치된 이야기는, 모세의 막강 지도자 권위와 역량에 도전했다가 벌을 받는 모세의 형 아론과 누이인 미르얌을 빗대어 하는 말씀이다. 남자이며 형인 아론은 모세의 발아래 납작 엎드려, “아,나의 주인님”이라고 죄를 실토하여 화를 모면했다. 여성이며 누이인 미르얌은 말 한마디 할 겨를도 없이 문둥병에 걸렸다. 저자는 이 문둥병이 아버지 하느님이 ‘침을 뱉은 것’이라고 친절하게 해석까지 달아 놓고 있다. 민수기 저자가 모세의 특급 위상을 염두에 두고 언급하는 이 “겸손”은 신앙과 믿음의 겸손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어떻게 보면 관습적이며 제도적 겸손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창조와 재창조의 영적이거나 복음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바로 소개할 신약시대 예수의 겸손에 비해서는 대양의 물 한 방울 같은 겸손이다. 아니 더 솔직하게는 아예 비교 불가이다. 이것에 대한 구체적 사례로는 요한 16,7를 제시한다. 신약성경 복음에서 겸손은 오직 마태오에서만 나온다.(마태 11.29=21,5) 마태 21,5절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시는 상황을 전하고 있다. 그분은 얼마나 겸손하신지 ‘새끼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다. 생각해보시라! 인성으로는 30세의 건장한 성인, 신성으로는 세상의 구세주께서 백마도 흑마도 아닌 나귀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타고 오는 모습을. 세상의 실력자들과 너무나 반대되는 이 모습은 우리가 얼핏 생각하는 그 겸손의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가 진짜 주목해야 할 다른 겸손의 모습이 있다. 바로 마태 11,29절에서 언급하는 “겸손”이다. 이것은 11장 전체를 자세히 보아야 하는 내용이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사도를 선발하시어 파견)사명을 명령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적대자들의 박해에 굴하지 말라고 독려하시며, 왕성한 복음 선포 활동을 전개하셨다.(마태 10장) 그런데 예수께서 하시는 이러한 일들이 수감 중인 세례자 요한의 귀에 들어갔다. 요한은 예수님의 인물평에 의하면 세상의 여자에게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최고의 사람이었다. 그런 천하의 요한이건만 아직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긴가? 민가?...’중이었다. 이런 경우 뜸들이지 말고 직방으로 여쭙는 것이 최고라, 자기 제자들을 보내 묻게 하였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바로 그분이십니까?...아니면...?” 예수께서 확실하고 명료하게 대답하셨다. “나를(의심하지 않고) 믿는 이는 행복하다. (설령 나는 의심하더라도) 내가 ’한 일‘(11,2)과 ’이룬 일(11,19)은 보고 믿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결론처럼 이렇게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11,28-29)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가장 완전하고 완벽한 겸손을 진수를 가르치시고 보여주신다. 겸손이란 존재와 사건의 본질과 실체를 바로 볼 줄 아는 것이고 바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겸손은 공부가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도 계속 계속.... 가령 나의 존재와 인격이 숫자로 환산하면 ‘6‘인데 ‘4‘라고 말하면 ‘비굴’이고 ‘7‘이라고 말하면 ’교만‘이다. 비굴과 교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비굴하기에 교만하고 교만하기에 비굴한 것이다. 존재와 사건의 본질과 실체를 들여다보고 살아가는 겸손은 그렇게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부단한 자기 노력과 하느님 도움의 손길이 있어야 한다. 노력 없는 겸손 은총 없는 겸손은 곧바로 비굴과 교만의 나락으로 빠져들기 쉽기 때문이다.
‘ㅁ 자매님’은 후천적 시각 장애인이다. 망막색소변성증이란 몹쓸 병이 그녀를 덮쳤기 때문이다. 성서백주간 구약을 다 마치고 신약을 하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하느님께 말씀 공부를 다 마칠 때까지 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눈물로 애원했지만, 점점 멀어져가는 시력으로 남은 지면들은 눈물로 쪼글쪼글 쪼그라들었을 뿐, 열한 살 작은 아들의 모습을 생生 눈으로 담고 영영 볼 수 없는 장님이 되어 버렸다. 신자 연예인인 이동우님도 같은 처지인 것으로 안다. 이런 경우 그분들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들을 어떤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태어날 때부터도 아니고 멀쩡하게 잘 보고 살다가,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이 현실의 수많은 사연 사연들을. 헤아릴 수도 형용할 수도 없는 십자가의 고통은 동병상련 처지가 아니고는 결코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날 자매님의 남편이 “너 안 보이는 거? 그거 거짓말이지?” 라고 울부짖더라는 고백은, 듣는 나의 마음도 예리하게 도려내는 아픔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광풍처럼 다가온 고통과 십자가에 주저앉지 않았다. 초인적인 믿음과 의지로 하나씩 극복하고 승리의 현실들을 이루어냈다. 점자를 배웠고 일상을 다시 훈련하고, 눈은 뜨고 있으나 인격이 눈 먼 이들이 던지는 무수한 상처와 모멸들의 파편들을, 때론 참아 받고 때론 도전하면서 이겨내는 삶을 살고 있다. 수년 전 자매님이 해설하는 부활 장엄미사를 함께 봉헌했다. 주례사제와 신자들과 호흡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맞추며, 전례 해설을 하는 모습에 놀랐고, 해설 한마디 한마디에 진하게 묻어나는 신앙의 무게감에 압도되었었다. 자매님은 대부분 성가의 모든 절을 몽땅 외운다. 나는 1절도 겨우 따라 하는데...시력을 잃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더 귀한 카리스마들을 많이 받은 “ㅁ 자매님!”, 나는 그녀가 우리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예수를 닮은 겸손한 신자임을간증하려고 한다.
그녀는 관할 본당에서 주간 전례 해설 봉사를 하고 있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수년째 해 오는 봉사이다. 그런데 그녀의 당번 일에 장례미사가 났다. 본당의 전례분과장 “ㄹ님”(이하 ㄹ님)은 직책 때문인지, ‘의전’이가장 의식되었던 것 같다. 장례미사 해설 누가 할 것인가 물어 오기에, “내가 당번 일이니 내가 한다”고 했다. 그러자 ㄹ님은난색을 표하며, “자매님이 이런데(?)해설하는 것을, 유가족과 참석자들이 보면 그렇지아니한가?”라고 하더란다. 이에 ㅁ 자매님이“그렇지 않는 것이 도대체 뭐냐? 문제없다. 내가 한다.”라고 응수했더니, 꼭 해야 한다면 “신부님께 허락을 받아라”라고 했다. “걱정마라 이미 받았다”고 하며 더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ㄹ 님, 지금 장례미사 해설자 선정과 나를 염두에 두고 한 말과 행동이, 하느님이 보시기에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자매님이 하느님도 말씀도 전례도 잘 모르니 지금 나에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앞으로 나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지 마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 자신을 비롯한 눈 뜬 사람들의 소경적 믿음과 일상을 성찰하였다. 동시에 믿음과 용기로 눈 뜬 사람의 무지와 만용에 직면 직설한 ‘ㅁ 자매님의 겸손’을 한껏 칭찬하였다. “잘했다 아무 소리 안했으면 시행착오가 반복될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잘했다”고. 우리 교회와 사회에는 이런 겸손이 드물고 약하다. 그러면서 겸손, 참 된 겸손이란 무엇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一謙四益(일겸사익)”이란 말이 있다. 한 번의 겸손은 천,지,신,인의 네 가지로부터 유익함을 가져오게 한다는 뜻으로, 겸손하여야 함을 강조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겸손謙遜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존중하고 자신을 낮추는 태도가 있다”라고 한다. 한자어도 이를 증명 하듯 그 훈을 겸손할 겸, 겸손할 손으로 강조하여 드러내고 있다. 영어는 ‘humility’로 라틴어 ‘humilis’에서 온 것으로 인간을 뜻하는 ‘human’과 함께 그 어원은 땅(humus)또는 흙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왜 흙과 땅일까? 흙과 땅의 본질과 실체는 무엇인가? 놀랍게도 2,500년 전 자연)철학자들은 자연과 세계의 기원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성경과 신앙의 차원에서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너무나 중요한 필요하고 좋은 창조물이다. 겸손에 대해 몇 가지 해석을 살펴보았는데, 나름대로 일리는 있지만 꽉 찬 느낌이 없이 뭔가 허전하였다. 그래서 성경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고맙게도 성경은 인류사에 가장 겸손했던 두 분에 대해 바로 전해주고 있었다. 모세와 예수이시다. 민수기는 모세의 겸손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런데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다.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민수 12,3)” 본문의 앞∙뒤에 배치된 이야기는, 모세의 막강 지도자 권위와 역량에 도전했다가 벌을 받는 모세의 형 아론과 누이인 미르얌을 빗대어 하는 말씀이다. 남자이며 형인 아론은 모세의 발아래 납작 엎드려, “아,나의 주인님”이라고 죄를 실토하여 화를 모면했다. 여성이며 누이인 미르얌은 말 한마디 할 겨를도 없이 문둥병에 걸렸다. 저자는 이 문둥병이 아버지 하느님이 ‘침을 뱉은 것’이라고 친절하게 해석까지 달아 놓고 있다. 민수기 저자가 모세의 특급 위상을 염두에 두고 언급하는 이 “겸손”은 신앙과 믿음의 겸손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어떻게 보면 관습적이며 제도적 겸손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창조와 재창조의 영적이거나 복음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바로 소개할 신약시대 예수의 겸손에 비해서는 대양의 물 한 방울 같은 겸손이다. 아니 더 솔직하게는 아예 비교 불가이다. 이것에 대한 구체적 사례로는 요한 16,7를 제시한다. 신약성경 복음에서 겸손은 오직 마태오에서만 나온다.(마태 11.29=21,5) 마태 21,5절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시는 상황을 전하고 있다. 그분은 얼마나 겸손하신지 ‘새끼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다. 생각해보시라! 인성으로는 30세의 건장한 성인, 신성으로는 세상의 구세주께서 백마도 흑마도 아닌 나귀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타고 오는 모습을. 세상의 실력자들과 너무나 반대되는 이 모습은 우리가 얼핏 생각하는 그 겸손의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가 진짜 주목해야 할 다른 겸손의 모습이 있다. 바로 마태 11,29절에서 언급하는 “겸손”이다. 이것은 11장 전체를 자세히 보아야 하는 내용이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사도를 선발하시어 파견)사명을 명령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적대자들의 박해에 굴하지 말라고 독려하시며, 왕성한 복음 선포 활동을 전개하셨다.(마태 10장) 그런데 예수께서 하시는 이러한 일들이 수감 중인 세례자 요한의 귀에 들어갔다. 요한은 예수님의 인물평에 의하면 세상의 여자에게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최고의 사람이었다. 그런 천하의 요한이건만 아직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긴가? 민가?...’중이었다. 이런 경우 뜸들이지 말고 직방으로 여쭙는 것이 최고라, 자기 제자들을 보내 묻게 하였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바로 그분이십니까?...아니면...?” 예수께서 확실하고 명료하게 대답하셨다. “나를(의심하지 않고) 믿는 이는 행복하다. (설령 나는 의심하더라도) 내가 ’한 일‘(11,2)과 ’이룬 일(11,19)은 보고 믿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결론처럼 이렇게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11,28-29)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가장 완전하고 완벽한 겸손을 진수를 가르치시고 보여주신다. 겸손이란 존재와 사건의 본질과 실체를 바로 볼 줄 아는 것이고 바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겸손은 공부가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도 계속 계속.... 가령 나의 존재와 인격이 숫자로 환산하면 ‘6‘인데 ‘4‘라고 말하면 ‘비굴’이고 ‘7‘이라고 말하면 ’교만‘이다. 비굴과 교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비굴하기에 교만하고 교만하기에 비굴한 것이다. 존재와 사건의 본질과 실체를 들여다보고 살아가는 겸손은 그렇게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부단한 자기 노력과 하느님 도움의 손길이 있어야 한다. 노력 없는 겸손 은총 없는 겸손은 곧바로 비굴과 교만의 나락으로 빠져들기 쉽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