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sters of Notre D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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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안식일
작성자
최성옥
작성일
조회
590
코로나 시대 안식일
이즈음 내가 다니고 있는 성당에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했다. 그것도 무려 12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행여나 하고 사무실에 알아보니 사실이었다. 하필이면 사고가 난 날은 본당 신부님의 이취임이 있던 날이고 장소였다. 그 유의미한 날에 마음 착하고 선한 신자들이 좀 모였었다. 나 또한 좋은 마음으로 동참했다. 그런데 ‘좋은 일에도 마가 끼는 법’이라고 덜컥 확진자가 생긴 것이다. 성당은 즉시 보름간 폐쇄조치 되었고, 확진자와 동선이 겹친 신자들은 모두 해당 보건소에서 감염 유무 검사를 받아야 했다. 당연히 나도 검사를 했고 결과는 음성이었다. 음성이라 가슴을 쓸어내리며 유연고자로 외부인 접촉에 만전을 기해야 했다. 밤 새 안녕이라더니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유한 인간존재와 달리, 유능하고 무한한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 주일을 맞았다.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주일 미사를 궐해야 한다는 것이 많이 찜찜했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때로는 사람과 세상, 특히 코로나로 야기된 어쩔 수 없는 상황에는 하느님께 대한 흠숭과 예배마저도 유예할 줄 아는 대국적 이성과 배려심도 신앙의 일부라고 스스로 거창하게 해석하며, 안식일을 말씀 통독,묵상, 대송으로 대신했다. 또다시 사람들과의 접촉을 경계하며 한 주간을 지내고 두 번째 주일을 맞았다. 지난 밤 까지도 첫 번째 주일처럼 지내기로 내심 작정하고 있었다. 더구나 주일에 공동체의 월 피정을 하기로 결정 했으니 이차저차 괜찮은 구실이 하나 더 추가할 수 있었다. 주일 아침 고요한 공간에 조용히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큰 수녀님 미사가시나?’ 허긴 이 번 주일도 그냥 지나가시기가 편하지만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조용했던 내 마음에 갑자기 분심의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 어쩐다지, 미사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가려고 생각하니 코로나 확진 성당 관계자라고 알면, 교우들이 보일 반응들이 우려되었다. 사실 수도 공동체 안에서도 코로나가 발생되고 난 뒤, 다양한 이해충돌들이 발생하는 것을 수차례 직접 목격한터라 근거없는 황당한 추정만도 아니다. 한두번 주일미사 건너뛴다고 뭐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괜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는 것은 그야말로 맹목적 신앙 일수도 있지. 그런데 정말 교우들에 대한 지극한 배려심이 전부인가? 다른 사심은 정말 터럭만큼도 없나?
안 가려고 하니 갑자기 저 구중심처로부터 올라오는 마음 하나가 하느님께 몹시 면목 없고 죄송스런 마음이었다. ‘천주는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분이라며?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이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한 거라며? 신자로서 한 주 168 시간 중에 1시간 안식일 도리를 다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거라며? 스스로와 다른 이들을 향해 침 튀기며 강조했던 것들은 다 허장성세였나?’
나는 이미 2주전 음성 판정을 받았으며 그동안 양호한 칩거생활을 하였고, 현재 체온과 컨디션도 좋은 편이었다. 특히 어제는 여러 사람이 모이는 친정 조카) 결혼식에도 인원 제한, 접촉경계와, 마스크 착용, 신속한 해당 장소 이탈 등 여러모로 신경이야 썼지만, 당연히 참석해야한다고 판단하고 다녀오지 않았는가? ‘설마 나의 하느님이 내 조카보다 못한것은 아니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선물로 덤으로 받은 인생,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주일에는 마음을 다하고 정성과 힘을 다해 흠숭과 예배드려야 된다고 알고 살고 실천해온 것은 그저 평안할 때나 준수하는 값싼 요식 행위였나? 하느님을 향한 내 신앙과 찬미의 진실은 어디까지이지? 차마 위선은 아니었나?‘
답은 간단하고 분명하고 신속하게 도출되었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흠숭하는 천주교인,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생명보다 중요한 안식일 준수 권리와 의무에 따라야 할 ‘당연’이라는 의식과 정체성을 너무 쉽고 가볍게 간과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히 부끄러웠다. 서둘러 가장 깨끗하고 좋은 주일 복으로 갈아입고 가까이 있는 성당을 찾았다. 발열 체크를 하고 스티커를 받는데, 예상했던 대로 그 성당에서 활동하시는 전교 수녀님이 물으셨다. “어디서 오셨어요?” ......, “네 지나가던 나그네에요.”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무대를 지나가는 나그네임이 분명하고 나도 육한년 몇 번째의 세월을 지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무슨 사연으로 발생했는지 알 수도 없고, 아직은 힘써 알려고도 하지 않는 우한 발發 코로나 역병이 2년째 전 세계를 무섭게 타격하고 있다. 이 무서운 감염병에 신중하고 조심할 필요는 차고도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인으로서 정체성 확립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며 그 일환으로 예배와 신앙생활의 증거도 대단히 중요하다. 매 주일마다 하느님 앞에 나아가, 교형자매들과 함께 경신례를 통해 바르고 옳게 사는 법을 배우고 친교를 나누며 증거의 삶으로 이어지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이것은 천주신앙을 믿으면 당장 힘들여 쌓은 권력과 재산을 빼앗기고 몰수당하고 자신의 생명과 집안까지 풍비박산이 났던 박해 시대의 믿음과 비교하면 대답은 간단하다. 또한 아무리 코로나 시대라지만 어떤 이유로든 하루도 먹지 않고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먹는 일을 반복하면서 생존을 연명하고 있다. 빵도 소중하지만 영원히 배고프지 않은 빵이신 하느님을 경외하고 흠숭하는 안식일 준수는 비교 불가한 부분이다. 민수기는 그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 안식일은 어긴 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민수15,35) 오직 세상의 빵만을 도모하는 것은 죄이고 재앙이다. 사람은 말씀이신 하느님의 빵으로도 살아야 한다. 21세기 환상적 풍요의 끝자락을 덮친 코로나 시대 현상들은 더 기묘한 유혹자가 되어 우리를 쉽고 가볍고 편안한 길로 가도 된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전염병과 세월에 주홍글씨를 박아 놓고 짐짓 무죄한 의인처럼 위장해서는 안된다. 코로나 시대의 신앙 현실 앞에서 거짓과 진실을 선택해야 하는 권리와 의무는 고스란히 인간존재 각자의 몫이다.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한다.
이즈음 내가 다니고 있는 성당에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했다. 그것도 무려 12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행여나 하고 사무실에 알아보니 사실이었다. 하필이면 사고가 난 날은 본당 신부님의 이취임이 있던 날이고 장소였다. 그 유의미한 날에 마음 착하고 선한 신자들이 좀 모였었다. 나 또한 좋은 마음으로 동참했다. 그런데 ‘좋은 일에도 마가 끼는 법’이라고 덜컥 확진자가 생긴 것이다. 성당은 즉시 보름간 폐쇄조치 되었고, 확진자와 동선이 겹친 신자들은 모두 해당 보건소에서 감염 유무 검사를 받아야 했다. 당연히 나도 검사를 했고 결과는 음성이었다. 음성이라 가슴을 쓸어내리며 유연고자로 외부인 접촉에 만전을 기해야 했다. 밤 새 안녕이라더니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유한 인간존재와 달리, 유능하고 무한한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 주일을 맞았다.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주일 미사를 궐해야 한다는 것이 많이 찜찜했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때로는 사람과 세상, 특히 코로나로 야기된 어쩔 수 없는 상황에는 하느님께 대한 흠숭과 예배마저도 유예할 줄 아는 대국적 이성과 배려심도 신앙의 일부라고 스스로 거창하게 해석하며, 안식일을 말씀 통독,묵상, 대송으로 대신했다. 또다시 사람들과의 접촉을 경계하며 한 주간을 지내고 두 번째 주일을 맞았다. 지난 밤 까지도 첫 번째 주일처럼 지내기로 내심 작정하고 있었다. 더구나 주일에 공동체의 월 피정을 하기로 결정 했으니 이차저차 괜찮은 구실이 하나 더 추가할 수 있었다. 주일 아침 고요한 공간에 조용히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큰 수녀님 미사가시나?’ 허긴 이 번 주일도 그냥 지나가시기가 편하지만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조용했던 내 마음에 갑자기 분심의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 어쩐다지, 미사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가려고 생각하니 코로나 확진 성당 관계자라고 알면, 교우들이 보일 반응들이 우려되었다. 사실 수도 공동체 안에서도 코로나가 발생되고 난 뒤, 다양한 이해충돌들이 발생하는 것을 수차례 직접 목격한터라 근거없는 황당한 추정만도 아니다. 한두번 주일미사 건너뛴다고 뭐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괜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는 것은 그야말로 맹목적 신앙 일수도 있지. 그런데 정말 교우들에 대한 지극한 배려심이 전부인가? 다른 사심은 정말 터럭만큼도 없나?
안 가려고 하니 갑자기 저 구중심처로부터 올라오는 마음 하나가 하느님께 몹시 면목 없고 죄송스런 마음이었다. ‘천주는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분이라며?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이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한 거라며? 신자로서 한 주 168 시간 중에 1시간 안식일 도리를 다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거라며? 스스로와 다른 이들을 향해 침 튀기며 강조했던 것들은 다 허장성세였나?’
나는 이미 2주전 음성 판정을 받았으며 그동안 양호한 칩거생활을 하였고, 현재 체온과 컨디션도 좋은 편이었다. 특히 어제는 여러 사람이 모이는 친정 조카) 결혼식에도 인원 제한, 접촉경계와, 마스크 착용, 신속한 해당 장소 이탈 등 여러모로 신경이야 썼지만, 당연히 참석해야한다고 판단하고 다녀오지 않았는가? ‘설마 나의 하느님이 내 조카보다 못한것은 아니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선물로 덤으로 받은 인생,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주일에는 마음을 다하고 정성과 힘을 다해 흠숭과 예배드려야 된다고 알고 살고 실천해온 것은 그저 평안할 때나 준수하는 값싼 요식 행위였나? 하느님을 향한 내 신앙과 찬미의 진실은 어디까지이지? 차마 위선은 아니었나?‘
답은 간단하고 분명하고 신속하게 도출되었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흠숭하는 천주교인,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생명보다 중요한 안식일 준수 권리와 의무에 따라야 할 ‘당연’이라는 의식과 정체성을 너무 쉽고 가볍게 간과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히 부끄러웠다. 서둘러 가장 깨끗하고 좋은 주일 복으로 갈아입고 가까이 있는 성당을 찾았다. 발열 체크를 하고 스티커를 받는데, 예상했던 대로 그 성당에서 활동하시는 전교 수녀님이 물으셨다. “어디서 오셨어요?” ......, “네 지나가던 나그네에요.”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무대를 지나가는 나그네임이 분명하고 나도 육한년 몇 번째의 세월을 지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무슨 사연으로 발생했는지 알 수도 없고, 아직은 힘써 알려고도 하지 않는 우한 발發 코로나 역병이 2년째 전 세계를 무섭게 타격하고 있다. 이 무서운 감염병에 신중하고 조심할 필요는 차고도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인으로서 정체성 확립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며 그 일환으로 예배와 신앙생활의 증거도 대단히 중요하다. 매 주일마다 하느님 앞에 나아가, 교형자매들과 함께 경신례를 통해 바르고 옳게 사는 법을 배우고 친교를 나누며 증거의 삶으로 이어지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이것은 천주신앙을 믿으면 당장 힘들여 쌓은 권력과 재산을 빼앗기고 몰수당하고 자신의 생명과 집안까지 풍비박산이 났던 박해 시대의 믿음과 비교하면 대답은 간단하다. 또한 아무리 코로나 시대라지만 어떤 이유로든 하루도 먹지 않고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먹는 일을 반복하면서 생존을 연명하고 있다. 빵도 소중하지만 영원히 배고프지 않은 빵이신 하느님을 경외하고 흠숭하는 안식일 준수는 비교 불가한 부분이다. 민수기는 그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 안식일은 어긴 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민수15,35) 오직 세상의 빵만을 도모하는 것은 죄이고 재앙이다. 사람은 말씀이신 하느님의 빵으로도 살아야 한다. 21세기 환상적 풍요의 끝자락을 덮친 코로나 시대 현상들은 더 기묘한 유혹자가 되어 우리를 쉽고 가볍고 편안한 길로 가도 된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전염병과 세월에 주홍글씨를 박아 놓고 짐짓 무죄한 의인처럼 위장해서는 안된다. 코로나 시대의 신앙 현실 앞에서 거짓과 진실을 선택해야 하는 권리와 의무는 고스란히 인간존재 각자의 몫이다.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