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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처럼 (루카15,11~32;6,36)

작성자

최성옥

작성일
조회

5

 

아버지처럼

(루카15,11~32;6,36)

 

시인이며 수필가, 영문과 교수를 지낸 수주樹州 변영로(1898~1961)의 일화. 한 번은 강의를 빼먹고 친구들과 종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변정상 씨 변정상 씨하고 아버지 이름을 불러댔다. 월남 이상재(1850~1927) 선생이었다. 명문가에다가 천재 소리를 듣던 콧대 높은 청년은 짜증을 냈다. “선생님 노망드셨습니까? 아무리 친구이기로서니 아버지 이름으로 아들을 부르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랬더니 선생은 아니 이놈아, 그럼 내가 변정상의 씨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하며 웃었다. 그날 청년은 기백이야 그만하면 됐으니 변씨 가문의 씨답게 체통을 지키고, 한국의 씨알머리가 있어야 한다라는 말씀을 듣고 크게 깨우쳤다고 한다.

 

사람이 귀한 것은 하느님의 를 가져서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 안에는 하느님의 씨 (본성本性:해설판 공동번역;1요한 3, 9)가 있습니다.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예수님의 승천하실 때 엎드려 경배는 했지만 더러는 의심하였다.”(마태 28,17)라고 하니 진리의 말씀을 듣고 들은 체 만 체 한다고 해서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믿거나 말거나 아들의 사명이란 아버지가 되는 데에 있다라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N 신부가 누군가와 맞서거나, 간청하거나, 훈계하거나 위로하느라 여기저기 떠다닌 세월은 실로 너무 길었다. 문득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그런 집이 그리워졌다. 영혼의 간절한 호소였다. 그런 고민에 휩싸여 지내던 무렵, 러시아의 한 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작품 탕자의 귀환을 대면하는 행운을 얻는다. 아버지가 작은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고 품에 끌어안는 장면 앞에서 그는 방황하던 둘째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닫는다. 기나긴 유량으로 탈진해 버린 아들처럼 당장 돌아가 아버지 품에 안기고 싶은 충동이 있었다. 결국 교수직을 버리고 장애인 공동체로 자리를 옮긴다. 인생 말년에 벌어진 영적 여정 1단계였다.

 

이어서 둘째 단계가 찾아왔다. 하루는 렘브란트 그림을 놓고 이야기하다가 친구로부터 내가 보기에 자네는 큰아들과 더 닮은 것 같은데...” 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집안의 맏아들이었다. 부모와 선생님들 주교들에게 그리고 하느님께 늘 순종하며 살았다. 집을 나가거나 쾌락을 위해 시간과 돈을 낭비한 일도 없었고, 방탕이나 술에 빠진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언제나 책임감을 느꼈고 전통을 따랐으며 교회라는 집을 지켰다. 살기는 둘째 아들처럼 이곳저곳 떠돌며 살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알고 보니 자신은 질투, 분노, 과민하고 완고한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묘한 독선을 가진 장남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는지 그리고 적대감에 찌든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살았는지 N 신부는 뒤늦게 깨달았다.

 

사제품 30주년쯤 다시 칠흑 같은 어둠에 빠졌다. 잠시 어느 오두막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영적 여정의 마지막 단계라고 부를 만한 일이 생겼다. 외진 오두막까지 찾아와 준 방문객의 말이 결정타였다. “자기를 작은 아들이라고 생각하든 큰아들이라고 여기든 상관없습니다. 누구든 아버지처럼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오랜 친구이기도 했던 노인은 참다운 동정同情의 권위자이신 아버지가 되십시오. 이것이 하느님의 소망입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헨리 나웬 신부의 고백이다. 우리는 흥청망청 재산을 탕진한 작은 아들이나 원망이 마음에 가득했던 큰아들에게는 쉽게 동질감을 느끼지만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신부는 늦게 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노인, 남은 일이라고는 그저 기다려 주는 것뿐인 아버지처럼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깨닫자 이루말할 수 없이 편안해졌다. 영적 여정의 마지막 단계였다.”

 

복사: 기쁨과 희망 소식지 제 1702, 2025615, 삼위일체 대축일

원 제목: 아버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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