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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작성자
최성옥
작성일
조회
583
권위 權威 authority
권위란 무엇인가? 권위에 대한 사회적 사전적 해석은, 특정 분야에서 뛰어나 인정을 받고 다른 사람을 지휘하거나 통솔하는 영향력이나 능력, 또는 조직과 제도의 이상과 목적을 원만하게 운행하기 위한 역할을 위해 부여되는 힘이라고 한다. 권위란 말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사회일반에서 사용되는 권위적이란 말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권위는 사람과 사회가 그것을 따름이 정당하다고 합의한 강제력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은 개념이라면, 권력은 사람과 사회가 싫어하더라도 무력적으로 할 수 있는 강제력으로 권위주의에 현대적 비속어로 갑질이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권위에 대한 라틴어의 해석은 ‘성장시키는 힘 또는 자者, 크게 하는 힘이나 자者’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라틴어의 이러한 해석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서 기원을 두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직접 기록한 신약성경 서간에서 권위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먼저 자기자신의 사도로서의 권위는, 위임도 그 행사도 예수의 권위에 그 기반을 두고 있음을 밝힌다.(1테살로니카 4,2) 따라서 자신은 권위를 신자들을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장’시키기 위한 목적이라고 한다.(2 코린토 10,8; 13,10참조)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적 질서와 향상을 위해 위로부터 오는 권위에 복종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로마 13,1-3) 그러나 권위에 대한 바른 통찰과 이해를 위해서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보다 더 직접적이고 명료한 예수의 가르침인 복음서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예수 시대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과 가르침 행동에서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과 달리 참 된 권위를 느꼈다”고 한다.(마르 1,22 참조) 예수의 어떤 점이 사람들로 하여금 참 된 권위를 감지하게 하였을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는 어떻게 참 된 권위자로 존재하고 가르칠 수 있었을까를 묻고 답을 찾는 자세라고 여겨진다.
첫째로 진정한 권위는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는 근원에 바탕을 둔 보편타당한 본질과 실체를 통찰하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참 된 하느님의 성령에 감도되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영에 따르지 않는 것은 거짓이거나 악령을 따르는 것이다. 권위가 없는 가르침 즉 거짓과 악령에 의한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가르치기는 하는데 하느님의 가르침이 아닌 가짜이므로 인간을 죄)악령에서 구하지 못하는 가르침이다. 악 또는 악령에서 구하는 가르침이 아니라면 결국 그 가르침은 권위가 없는 가르침이다. 다음의 예화가 이 말을 명료하게 이해시켜 준다.
인도의 전설 중에 이런 우화가 있다. 한 생쥐가 고양이가 너무 무서워 고민하다가 뛰어난 능력을 갖춘 마술사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도움을 구했다. “마술사님, 저는 고양이가 너무 무섭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마술사는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생쥐를 불쌍히 여겨 생쥐를 고양이로 바꾸어 주었다. 그런데 고양이가 된 생쥐가 다음날 또 마술사를 찾아갔다. “마술사님, 제가 고양이가 되고 보니 이제는 개가 너무 무섭습니다.” 그러자 마술사는 고양이가 된 생쥐를 다시 개로 바꾸어 주었다. 그런데 개가 된 생쥐가 다음날 또 마술사를 찾아간 것이다. “마술사님, 개가 되고 보니 이제는 사자가 너무 무섭습니다.” 할 수 없이 마술사는 개가 된 생쥐를 사자로 바꾸어 주었다. ‘이제 동물의 왕인 사자가 되었으니 더는 무서워하지 않겠지!’ 하고 마술사는 생각했다. 그런데 사자가 된 생쥐가 다음날 또 찾아온 것이 아닙니까? “마술사님, 제가 사자가 되고 보니 이제는 사냥꾼이 너무나 무섭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덩치 큰 사자가 되어서도 여전히 두려움 속에 있는 생쥐를 어이없이 쳐다보던 마술사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는 몸은 사자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생쥐의 마음이구나. 그러니 다시 생쥐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이 우화에서 멍청하고 그릇된 대상은 쥐일까, 마술사일까? 답은 마술사라고 생각이 든다. 근본적인 문제는 제시해주지 않고 겉도는 가르침만 주어 쥐를 여전히 못난 처지에 있게 한 것이다. 만약 권위 있는 훌륭한 마술사라면 애초부터 쥐의 두려움을 없애 주려 노력했어야 할 것이다. (전삼용 신부님 묵상글 글 발췌)
두 번째로 권위는 권위자의 언행言行이 일치 하는가 불일치 하는가로 확인할 수 있다. 인간존재는 본성상 말은 힘 안들이고 쉽게 할 수 있으나, 투신과 행동은 결코 가볍지 않는 힘든 수고가 따라야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걸려 넘어져, 무겁고 힘든 짐을 다른 사람들 어깨 위에 올려놓고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권위는커녕 위선자로 비쳐지게 된다.
세 번째 참 된 권위는 상호 성장시키고 완성시키는 건강하고 복음적인 영향력이다. 여기서는 “상호”라는 말이 중요하다. 권위는 근원적으로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양방향적인 속성과 본질을 담고 있다. 권위가 보다 힘을 더 가진 자의 방향에서 행사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다. 올바른 권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상호 권리와 책임이 정의롭고 균형있게 주어져 있고 행사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위의 현재 상황은 보다 더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리더가, 자기 앞과 뒤 옆에 함께 하는 자들에게 바람직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것에 반하는 것은 권위를 가장하였으되, 모두 잘못되고 거짓된 권위이다. 돈더즈 신부님과 웰즈는 이러한 참 된 권위의 모범을 예수로부터 통찰하여 특유의 탁월한 신학과 문학으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예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느꼈던 것도
바로 이런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분과 그분의 말씀은
여러분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분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인생이 무엇인지,
하느님이 무엇인지,
등등의 것을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그분에게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장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거친 것(Wild)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대장이니
‘너희들은 복종하라’가 아닙니다.
권위가 있다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권위란 영향력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건강한 영향력이어야 합니다.
우리 일생에서 그런 식의 권위를 가진
누군가를 만날 수 있게끔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우리의 최선의 친구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더즈 신부님)
“참으로 위대한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긍심을 갖게 하는 사람이다.
웰즈는 위대함의 판단 정도는, 그 사람이 자기 뒤에
무엇이 자라도록 남겨 두었나 하는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예수는 으뜸이다”라고 한다.“(웰즈)
예수시대 사람들이 예수께 참 된 권위를 찾아 볼 수 있었던 것은,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거룩한 뜻인 성령에 그 근본적 통찰이 닿아 있고, 다음으로 언행 즉 가르치심과 실천이 늘 여일하며, 당신의 앞과 뒤 옆을 따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살리고 성장시키며 완성시키는 것에서 드러난다. 그러니 예수의 권위에 반反하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권위는 대부분 가짜요 거짓된 권위이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와 사회 어디에서 누구도 예외도 구분도 없이 모두 적용되는 진리이다.
권위란 무엇인가? 권위에 대한 사회적 사전적 해석은, 특정 분야에서 뛰어나 인정을 받고 다른 사람을 지휘하거나 통솔하는 영향력이나 능력, 또는 조직과 제도의 이상과 목적을 원만하게 운행하기 위한 역할을 위해 부여되는 힘이라고 한다. 권위란 말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사회일반에서 사용되는 권위적이란 말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권위는 사람과 사회가 그것을 따름이 정당하다고 합의한 강제력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은 개념이라면, 권력은 사람과 사회가 싫어하더라도 무력적으로 할 수 있는 강제력으로 권위주의에 현대적 비속어로 갑질이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권위에 대한 라틴어의 해석은 ‘성장시키는 힘 또는 자者, 크게 하는 힘이나 자者’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라틴어의 이러한 해석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서 기원을 두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직접 기록한 신약성경 서간에서 권위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먼저 자기자신의 사도로서의 권위는, 위임도 그 행사도 예수의 권위에 그 기반을 두고 있음을 밝힌다.(1테살로니카 4,2) 따라서 자신은 권위를 신자들을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장’시키기 위한 목적이라고 한다.(2 코린토 10,8; 13,10참조)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적 질서와 향상을 위해 위로부터 오는 권위에 복종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로마 13,1-3) 그러나 권위에 대한 바른 통찰과 이해를 위해서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보다 더 직접적이고 명료한 예수의 가르침인 복음서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예수 시대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과 가르침 행동에서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과 달리 참 된 권위를 느꼈다”고 한다.(마르 1,22 참조) 예수의 어떤 점이 사람들로 하여금 참 된 권위를 감지하게 하였을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는 어떻게 참 된 권위자로 존재하고 가르칠 수 있었을까를 묻고 답을 찾는 자세라고 여겨진다.
첫째로 진정한 권위는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는 근원에 바탕을 둔 보편타당한 본질과 실체를 통찰하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참 된 하느님의 성령에 감도되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영에 따르지 않는 것은 거짓이거나 악령을 따르는 것이다. 권위가 없는 가르침 즉 거짓과 악령에 의한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가르치기는 하는데 하느님의 가르침이 아닌 가짜이므로 인간을 죄)악령에서 구하지 못하는 가르침이다. 악 또는 악령에서 구하는 가르침이 아니라면 결국 그 가르침은 권위가 없는 가르침이다. 다음의 예화가 이 말을 명료하게 이해시켜 준다.
인도의 전설 중에 이런 우화가 있다. 한 생쥐가 고양이가 너무 무서워 고민하다가 뛰어난 능력을 갖춘 마술사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도움을 구했다. “마술사님, 저는 고양이가 너무 무섭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마술사는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생쥐를 불쌍히 여겨 생쥐를 고양이로 바꾸어 주었다. 그런데 고양이가 된 생쥐가 다음날 또 마술사를 찾아갔다. “마술사님, 제가 고양이가 되고 보니 이제는 개가 너무 무섭습니다.” 그러자 마술사는 고양이가 된 생쥐를 다시 개로 바꾸어 주었다. 그런데 개가 된 생쥐가 다음날 또 마술사를 찾아간 것이다. “마술사님, 개가 되고 보니 이제는 사자가 너무 무섭습니다.” 할 수 없이 마술사는 개가 된 생쥐를 사자로 바꾸어 주었다. ‘이제 동물의 왕인 사자가 되었으니 더는 무서워하지 않겠지!’ 하고 마술사는 생각했다. 그런데 사자가 된 생쥐가 다음날 또 찾아온 것이 아닙니까? “마술사님, 제가 사자가 되고 보니 이제는 사냥꾼이 너무나 무섭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덩치 큰 사자가 되어서도 여전히 두려움 속에 있는 생쥐를 어이없이 쳐다보던 마술사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는 몸은 사자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생쥐의 마음이구나. 그러니 다시 생쥐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이 우화에서 멍청하고 그릇된 대상은 쥐일까, 마술사일까? 답은 마술사라고 생각이 든다. 근본적인 문제는 제시해주지 않고 겉도는 가르침만 주어 쥐를 여전히 못난 처지에 있게 한 것이다. 만약 권위 있는 훌륭한 마술사라면 애초부터 쥐의 두려움을 없애 주려 노력했어야 할 것이다. (전삼용 신부님 묵상글 글 발췌)
두 번째로 권위는 권위자의 언행言行이 일치 하는가 불일치 하는가로 확인할 수 있다. 인간존재는 본성상 말은 힘 안들이고 쉽게 할 수 있으나, 투신과 행동은 결코 가볍지 않는 힘든 수고가 따라야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걸려 넘어져, 무겁고 힘든 짐을 다른 사람들 어깨 위에 올려놓고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권위는커녕 위선자로 비쳐지게 된다.
세 번째 참 된 권위는 상호 성장시키고 완성시키는 건강하고 복음적인 영향력이다. 여기서는 “상호”라는 말이 중요하다. 권위는 근원적으로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양방향적인 속성과 본질을 담고 있다. 권위가 보다 힘을 더 가진 자의 방향에서 행사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다. 올바른 권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상호 권리와 책임이 정의롭고 균형있게 주어져 있고 행사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위의 현재 상황은 보다 더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리더가, 자기 앞과 뒤 옆에 함께 하는 자들에게 바람직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것에 반하는 것은 권위를 가장하였으되, 모두 잘못되고 거짓된 권위이다. 돈더즈 신부님과 웰즈는 이러한 참 된 권위의 모범을 예수로부터 통찰하여 특유의 탁월한 신학과 문학으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예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느꼈던 것도
바로 이런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분과 그분의 말씀은
여러분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분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인생이 무엇인지,
하느님이 무엇인지,
등등의 것을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그분에게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장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거친 것(Wild)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대장이니
‘너희들은 복종하라’가 아닙니다.
권위가 있다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권위란 영향력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건강한 영향력이어야 합니다.
우리 일생에서 그런 식의 권위를 가진
누군가를 만날 수 있게끔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우리의 최선의 친구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더즈 신부님)
“참으로 위대한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긍심을 갖게 하는 사람이다.
웰즈는 위대함의 판단 정도는, 그 사람이 자기 뒤에
무엇이 자라도록 남겨 두었나 하는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예수는 으뜸이다”라고 한다.“(웰즈)
예수시대 사람들이 예수께 참 된 권위를 찾아 볼 수 있었던 것은,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거룩한 뜻인 성령에 그 근본적 통찰이 닿아 있고, 다음으로 언행 즉 가르치심과 실천이 늘 여일하며, 당신의 앞과 뒤 옆을 따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살리고 성장시키며 완성시키는 것에서 드러난다. 그러니 예수의 권위에 반反하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권위는 대부분 가짜요 거짓된 권위이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와 사회 어디에서 누구도 예외도 구분도 없이 모두 적용되는 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