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sters of Notre D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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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해서 다행입니다"
작성자
최성옥
작성일
조회
670
“불행해서 다행입니다”
아홉 살, 가을날이었습니다
제 앞에 아버지가 서 계셨습니다. 저를 꼭 안아 주신 후에 그분은 자신의 인생을 향해 떠나셨습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아버지의 부재를 ‘불행’으로 해석했습니다. 어린 제가 정의한 불행은 ‘사라짐’이었습니다. 작별의 촉수가 예민해진 저는 제 앞에 선 이가 사라져 갈 때 유독 고통스러웠습니다.
저는 불완전한 노동자였습니다.거푸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했던 그 해, 오랫동안 공을 드렸던 일이 부당한 이유로 허사가 되었습니다. 강하게 항의했던 저는 아예 그 일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이 생존을 위해 사라져 갔습니다. 고통이 목울대까지 차오르던 날들이었습니다.그 즈음 주보에서 성서백주간(이하 백주간) 모임 문구를 보았습니다.
저는 치유를 원했습니다.
당시 저에게 치유란 심판이었습니다.
제 ㅈ신 폐허가 되어 가는 건, 제 탓이 아니라 순전히 악랄한 그들 탓이라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살 것 같았습니다. 성서는 정의롭기에 그렇게 심판해 주리라 믿었습니다.
백주간을 찾아갔습니다.
나눔 시간마다 원망과 배신 편견들이 튀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했습니다.
제가 듣기론 별 잘못이 없는 분도 기어이 자신의 죄를 적발(?)하는 기도로 마무리가 되곤 했습니다.
겉으론 곰곰이 듣는 척했으나 속으론 바보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선 억울함을 당당히 말하기 힘들 것 같았습니다.
제 위선도 싫었습니다.
백주간을 떠나리라 마음 먹었던 그때에 노아를 만났습니다. 하느님은 노아와 그에게 부탁한 피조물을 제외한 온 생명을 다 죽이셨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부당한 선택에 화가 치밀었습니다. 어쩌면 줄곧 탈락했던 저의 생, 아버지로부터 상사로부터 버려진 고통을 투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창세기를 마치고도 백주간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성서의 부당함을 끝까지 읽어 보겠다는 일종의 오기였습니다. 그러나 성서를 읽어 갈수록 그 오기가 가시가 되어 저를 찔렀습니다. 가장 괴로운 것은 하느님의 논리와 세상의 논리가 판이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서는 제게 말했습니다. 네 부당함은 부당함이 아니고, 네 옳음은 옳음이 아니라고.
하느님을 닮으려면 어리석어야 한다고.
더 버려져야 하고 더 포기해야 하고 더 무너져야 한다고.
미칠 것 같았습니다.
대체 얼마나 더 비참해지란 말인지요.
이런 하느님을 왜 믿어야 하느냐는 내면의 요동을 견딜 수 없었던 어느 하루, 십 수 년간 거의 제 모든 시간이었던 애지중지했던 일감들, 그러니까 제 정체성의 상당 부분을 불태웠습니다. 어쩌자고 그런 행동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진 못합니다.
분명한 건 그 도발이 제게 묘한 해방이 되어 준 것입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 기어이 인정받고 싶었던 헛된 집착과 집착이 낳은 죄들이 보였습니다.
많이 울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하느님께 용서를 청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고해였습니다.
그제야 그 바보 같은 기도가 조금씩 납득이 되었습니다.
불 길 앞에서의 고해는 아마도 제가 확신했던 것을 부정하는, 부정했던 것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어 준 듯합니다. 재가 되어 까맣게 바스러지는 교만 앞으로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아버지의 부재가 불행인가.
사라짐이 고통인가.
비인간적이고 몰인격적인 대우가 억울함인가.
부당함이 분노인가.
성서는 말했습니다.
그게 다가 아니라고,
그건 부분적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그것을 뛰어넘으라고 말했습니다.
불행해서 다행이라고,
죽음 같은 시간들을 살 수 있어 다행이라고,
이 역설의 증명이 하느님이라고.
그 역설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실패하고 배척당하고 고뇌하다 무력하게 살해된 분이 하느님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하느님의 역설에 온전히 순종할 때 자유로울 수 있으며, 자유로운 자만이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저는 여전히 불행합니다.
그러나 행복했더라면 백주간을 찾지 않았을 겁니다.
성서도 읽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느님의 고독과 상처를 먹먹해하지도,
켜켜이 쌓인 제 되를 알아차릴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 계산 없이 저를 아껴 주는 선물 같은 분들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불행해서 다행이라고.
참 다행이라고.
손성금 제노비아님 글
(성서백주간 25년 소식지, 발췌)
'세상과 진리에대한 역설의 이해와 증거가 마음 깊이 감동과 아픔의 공유로 다가온 귀한 글입니다. '
아홉 살, 가을날이었습니다
제 앞에 아버지가 서 계셨습니다. 저를 꼭 안아 주신 후에 그분은 자신의 인생을 향해 떠나셨습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아버지의 부재를 ‘불행’으로 해석했습니다. 어린 제가 정의한 불행은 ‘사라짐’이었습니다. 작별의 촉수가 예민해진 저는 제 앞에 선 이가 사라져 갈 때 유독 고통스러웠습니다.
저는 불완전한 노동자였습니다.거푸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했던 그 해, 오랫동안 공을 드렸던 일이 부당한 이유로 허사가 되었습니다. 강하게 항의했던 저는 아예 그 일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이 생존을 위해 사라져 갔습니다. 고통이 목울대까지 차오르던 날들이었습니다.그 즈음 주보에서 성서백주간(이하 백주간) 모임 문구를 보았습니다.
저는 치유를 원했습니다.
당시 저에게 치유란 심판이었습니다.
제 ㅈ신 폐허가 되어 가는 건, 제 탓이 아니라 순전히 악랄한 그들 탓이라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살 것 같았습니다. 성서는 정의롭기에 그렇게 심판해 주리라 믿었습니다.
백주간을 찾아갔습니다.
나눔 시간마다 원망과 배신 편견들이 튀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했습니다.
제가 듣기론 별 잘못이 없는 분도 기어이 자신의 죄를 적발(?)하는 기도로 마무리가 되곤 했습니다.
겉으론 곰곰이 듣는 척했으나 속으론 바보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선 억울함을 당당히 말하기 힘들 것 같았습니다.
제 위선도 싫었습니다.
백주간을 떠나리라 마음 먹었던 그때에 노아를 만났습니다. 하느님은 노아와 그에게 부탁한 피조물을 제외한 온 생명을 다 죽이셨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부당한 선택에 화가 치밀었습니다. 어쩌면 줄곧 탈락했던 저의 생, 아버지로부터 상사로부터 버려진 고통을 투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창세기를 마치고도 백주간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성서의 부당함을 끝까지 읽어 보겠다는 일종의 오기였습니다. 그러나 성서를 읽어 갈수록 그 오기가 가시가 되어 저를 찔렀습니다. 가장 괴로운 것은 하느님의 논리와 세상의 논리가 판이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서는 제게 말했습니다. 네 부당함은 부당함이 아니고, 네 옳음은 옳음이 아니라고.
하느님을 닮으려면 어리석어야 한다고.
더 버려져야 하고 더 포기해야 하고 더 무너져야 한다고.
미칠 것 같았습니다.
대체 얼마나 더 비참해지란 말인지요.
이런 하느님을 왜 믿어야 하느냐는 내면의 요동을 견딜 수 없었던 어느 하루, 십 수 년간 거의 제 모든 시간이었던 애지중지했던 일감들, 그러니까 제 정체성의 상당 부분을 불태웠습니다. 어쩌자고 그런 행동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진 못합니다.
분명한 건 그 도발이 제게 묘한 해방이 되어 준 것입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 기어이 인정받고 싶었던 헛된 집착과 집착이 낳은 죄들이 보였습니다.
많이 울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하느님께 용서를 청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고해였습니다.
그제야 그 바보 같은 기도가 조금씩 납득이 되었습니다.
불 길 앞에서의 고해는 아마도 제가 확신했던 것을 부정하는, 부정했던 것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어 준 듯합니다. 재가 되어 까맣게 바스러지는 교만 앞으로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아버지의 부재가 불행인가.
사라짐이 고통인가.
비인간적이고 몰인격적인 대우가 억울함인가.
부당함이 분노인가.
성서는 말했습니다.
그게 다가 아니라고,
그건 부분적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그것을 뛰어넘으라고 말했습니다.
불행해서 다행이라고,
죽음 같은 시간들을 살 수 있어 다행이라고,
이 역설의 증명이 하느님이라고.
그 역설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실패하고 배척당하고 고뇌하다 무력하게 살해된 분이 하느님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하느님의 역설에 온전히 순종할 때 자유로울 수 있으며, 자유로운 자만이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저는 여전히 불행합니다.
그러나 행복했더라면 백주간을 찾지 않았을 겁니다.
성서도 읽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느님의 고독과 상처를 먹먹해하지도,
켜켜이 쌓인 제 되를 알아차릴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 계산 없이 저를 아껴 주는 선물 같은 분들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불행해서 다행이라고.
참 다행이라고.
손성금 제노비아님 글
(성서백주간 25년 소식지, 발췌)
'세상과 진리에대한 역설의 이해와 증거가 마음 깊이 감동과 아픔의 공유로 다가온 귀한 글입니다. '